2013.03.03 20:57

스토커, 숨 막히는 영화

숨이 막혀 질식할 뻔 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집에 도착하여 바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에도, 지울 수 없는 강한 각인의 영화가 바로 이 영화였다. 

박찬욱의 "스토커"






혹자는 시나리오를 깠다.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 역으로 연기했던 배우 웬트워스 밀러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각본은 엉망이고 연출만이 빛났던 영화라고 평하고 있는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각본에 대한 것은 접어 두고 볼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폄훼될 정도의 각본은 아닌 것 같았다. 

다소 직선적인 스토리텔링이었지만, 무리 없는 스토리 전개였다.

복선으로 사용된 몇 가지 소재들 - 오브제에 가까운 소재들이기는 했지만 - 역시 무리없이 드러나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삼촌 찰리의 비밀을 알려주는 장면은 너무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는 - 기존의 다른 박찬욱의 작품에서보다 매우 친절히 서술해 주고 있었다 - 시나리오였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 인디아의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8살의 생일, 즉 성인의 생일을 맞은 인디아에게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 의문의 삼촌 찰리의 등장, 그리고 엄마와 딸 간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인디아의 감정적, 성적 성장통을 영화의 표면에 담았다고 할까.

인디아 역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중성적이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심리의 상태를 보이는데, 마치 배두나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18세 생일이라는 소재를 통해, 영화는 주인공이 아이에서 어른이 됨과 동시에, 소년의 이미지에서 숙녀의 이미지로의 변모하는 그 경계선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마스크와 성격을 보여줌과 동시에, 카메라는 그녀의 몸매를 하나하나 훝으면서 그녀의 여성적인 이미지를 관능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연출은 에로틱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카메라가 주인공의 발을 주목하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되는 발 페티시즘은 그녀의 신발과 구두를 그리고 있고, 주요 장면에서 카메라는 항상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관능적 장치는 찰리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직접적인 묘사가 전혀 없는 장면에서 이러한 효과를 얼마나 잘 만들어 냈는지.....

 


찰리는 영화 속에서 내내 그 속을 알 수 없는 그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을 연기하는데, 매튜 구드의 연기는 의뭉한 속을 가진 인물을 있는 그대로 연기하고 있다. 

인디아 역의 미아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비해 니콜 키드만의 연기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미장센과 편집을 빼놓을 수가 없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화면을 상하로 분할하는 구도의 롱샷, 

익스트림 클로즈 업으로 인디아의 얼굴과 주변 환경의 사물을 보여 주되, 

교차 편집으로 그 이미지를 하나하나 담는 시퀀스,

슬로우 모션과 정지영상, 

배우 이름과 주요 스탭의 이름을 보여주는 오프닝 크레딧 문구의 연출,

하나하나가 매우 인상적인 시퀀스인데,

오프닝 시퀀스 동안 동시에 18번째 생일을 맞은 인디아의 모습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편집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 인디아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동시에, 엄마 이블린은 찰리의 방으로 향하고, 인디아의 친척 할머니가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가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살인이 발생하는 또 다른 장면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시퀀스,

- 그리고 밤 중에 찰리와 인디아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인디아는 샤워를 하고, 그 동안에 발생했던 일을 시간의 역순으로 편집하여 보여주는 시퀀스,

이 두 장면의 교차편집은 매우 효과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그 외에 그녀의 신발들을 한번에 훝어 보여주는 장면 연출이나, 

머리카락을 빚어 넘겨 야외로 공간이 변하는 장면 등의 연출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웠다.


별 일 아닌 것 같은 실내 장면에서 롱 테이크로 찍기도 하고, 

좌우 공간과 상하 공간을 기하학적인 구도로 나누어 만들어 낸 미장센 등...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까지 들어가는 노력이 느껴졌다.



영화는 점점 긴박감이 최고조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만, 시나리오 자체가 그리 빠른 호흡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나리오는 정공법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짚고 넘어가고 있었으나, 감독의 연출은 시나리오의 호흡과는 달리 시각적 장치를 통해 주인공 내부의 갈등을 더욱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있었고, 

막바지에 도달하는 순간, 더 이상 관객이 숨을 쉴 수 없을 연출로 그 점을 찍어 버린다.





지금까지 박찬욱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불편감이 있었는데, 특히 "박쥐"과 "쓰리 몬스터, 컷"에서 느꼈던 그런 불편감은 없다. 직접적으로 신체를 훼손한다거나, 성적으로 불편한 장면을 담는다거나 이런 장면은 전혀 없기 때문에. 다만 직접적인 묘사 없이도 잔인성과 관능성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연출을 담아 내다니..

이 영화에서는 김지운의 "장화, 홍련"을 연상시키는 고딕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고, 이런 아름다움 속에 작지만 날카로운 바늘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



아름답다고 느끼는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피아노 연탄곡은 작품의 호흡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영화에 쓰인 스코어 하나하나는 '이 음악 쓴 사람이 대체 누구야' 찾아 보게 만들 정도로 가슴에 박히는 것이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 "블랙 스완"의 음악을 썼던 클린트 멘셀과 "디 아워스"의 음악 감독 필립 글래스가 곡을 썼다는데, 음반을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는 음악들이다.

특히 인디아와 찰리가 함께 피아노 연탄곡을 연주하는 장면의 "Duet"은 지금도 그 선율이 머리 속에 계속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박찬욱 작품 중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복수는 나의 것"에 필적하는 작품으로 꼽고 싶다.

박찬욱 감독이 본인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작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높이 사고 싶은 부분이다. 얼마 전에 봤는 김지운의 헐리우드 대뷔작 "라스트 스탠드"를 다소 실망스럽게 봤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다.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 제작을 지원했다는 것도 놀라웠고. (스탭롤이 모두 올라간 다음에 리들리 스콧의 프로덕션 로고가 그제서야 등장한다. 모호필름은 타이틀에 안 나오더군.)



덧.

극 중에서 인디아의 학교 동료들이 "Stroker"라고 놀리는 것을 자막으론 "스티커"라고 썼는데, 분명히 "Stroker"로 발음한 게 맞음. 왜 그렇게 번역을 했을까.. 

stroke v. 쓰다듬다, 달래다, 성관계를 하다.








스토커 (2013)

Stoker 
7.4
감독
박찬욱
출연
미아 바시코브스카, 매튜 구드, 더모트 멀로니, 재키 위버, 니콜 키드먼
정보
드라마, 스릴러 | 미국 | 99 분 | 2013-02-28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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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2
  1. Favicon of http://.... BlogIcon 소담 2013.03.07 23:5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언어유희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식으로 살짝 비튼 듯 합니다.
    stroke: 쓰다듬어 남근을 애무하다, stroke+er: ~하는 사람
    stoker, stroker 스펠링 한끗 차이이긴 하나 발음상 표기 '스트로커'라해도 뜻 '애무하는사람'이라 번역해도 국내관객이 말장난을 이해하기엔 뜬금없으니 의역한 것 같아요.
    저도 먼저 영어 예고편으로 봤지만 저 대사를 어떻게 번역할까 궁금했는데
    극장에서 자막보고 센스에~감탄! 스토커 스티커 붙어먹다!

    • Favicon of http://gp.pe.kr BlogIcon 지피군 2013.03.09 17:17 신고 address edit & del

      문학이나 연극이나, 영화나 외국어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뉘앙스를 살리는 게 어려운 일이죠. 한편으로는 원래의 의미가 벗어나서 아쉽기도 하지만, 그걸 또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또 그 묘미를 찾을 수 없으니... 뭐 어느 정도 괜찮은 결과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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