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5. 01:09

스페인 내전의 비극.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오랜만에 정말 강렬한 영화를 하나 보게 되었다.

전쟁, 폭력, 고어, 섹스의 문법에

영상, 음악, 연기, 분장, 의상, 각본, 연출, 그리고 주제의 문제 의식까지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요소가 하나도 없는,

스페인 영화 "Balada triste de trompeta (The Last Circus)"









스페인어 영화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El laberinto del fauno, Pan's Labyrinth)" 이후 두 번째.

일찍이 멕시코 출신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 (21 Grams)"과 "바벨 (Babel)"을 경험한 적이 있으나, 

이 두 작품은 헐리우드 배우를 중심으로 하여 영어로 제작된 영화기 때문에 조금 구분은 두어야 할 것 같다.


"판의 미로"나 이 작품 모두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데,

하필 딱 두 편 봤다는 스페인어 영화는 왜 다 이 소재인걸까!




"판의 미로"에서는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선 1940년대를 배경으로 

지방 반란군의 프랑코 정권에 대한 저항을 환타지를 빌어 그렸다면,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스페인 내전의 발발에서부터 독재자 프랑코의 죽음을 어우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한 광대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광대 집안의 하비에의 유년 시절은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어 

수도 마드리드까지 전투가 진행되고 있을 1937년에서부터 그려진다.

어머니 없이 광대 아버지 아래에서 홀로 자라고 있던 하비에는 

공화국군이 그의 아버지를 강제 징집하면서 더욱 불우한 시절을 지내게 되고,

청소년이 된 그에게 아버지가 남긴 말은 "슬픈 광대가 되어라" 그리고 "복수를 해라"

훗날 그의 아버지는 마드리드 인근의 "전몰자의 계곡 (El Valle de los Caidos)"에 세워지게 될 바실리카와 초대형 십자가 건설에 노역부로 동원된다.



Valle de los Caídos의 전경. 포로들을 부려서 이런 걸 만들다니..
Photo from Wikipedia.com



여전히 프랑코의 독재 하에 있던 1973년. (프랑코가 정치에서 뒷선으로 물러나는 해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하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대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의 바램대로 아이들을 웃기는 역할의 "웃긴 광대"가 아닌, 웃긴 광대의 조롱거리가 되는 "슬픈 광대"가 된다.


서커스단에서 만나게 되는 웃긴 광대 세르지오는 서커스단의 독재자이다.

그의 말에 어느 누구도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도 없고, 

그의 애인 나탈리아 역시 세르지오의 폭력에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모두들 그를 "짐승"으로 여기고 있으나,

서커스단의 동료들 모두 세르지오에게 억압 당하면서도 그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나탈리아 역시 세르지오의 폭력에 매일 피멍이 들면서도 그와의 섹스는 거부하지 못할 유혹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


다만 하비에는 달랐다.

서커스단 내의 불합리한 독재적 존재 세르지오에 대해 순순히 동의하지 못 하고,

세르지오에게 학대 받고 있는 나탈리아를 연민의 눈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하비에의 모습에 나탈리에는 하비에에게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하비에는 나탈리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세 사람의 관계는 세르지오와 하비에 간의 피로 물든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세르지오의 폭력에 의한 사고들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나탈리에를 포함한 서커스단원들은 세르지오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고, 

하비에는 점점 미쳐가면서 나탈리에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듯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세르지오와 하비에는 모두 나탈리에 한 여자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고,

이전에 연민과 사랑으로 나탈리에를 대하던 하비에는 어느샌가 이전의 세르지오와 같이 여자를 정복하기 위한 "짐승"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두 광대는 끝까지 "웃는 광대"와 "슬픈 광대"로 남겨졌다는 것...





주인공 간의 사건은 한 여자를 둔 두 남자의 싸움이 주를 이루지만,

하비에가 중간중간 겪게 되는 사건 중에 프랑코를 직접 대면하고, 그의 심복들과 부딪히게 되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건과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두 남자, 독재자 세르지오와 저항세력 하비에를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독재 시절을 잇는 시대배경의 정치적/군사적 갈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권력의 피해자로 남게 되는 여인 나탈리에를 나타내고 있다.





스페인이라는 한 공간 내에서 두 세력이 권력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동안, 

프랑코와 손을 잡았던 나치정권에 의해 게르니카는 폭격을 맞게 되고, 전 국토가 박살이 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한 여자를 두고 싸움을 벌이던 두 남자에 의해 

서커스 단원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감독은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남기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갈등은 이 두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 대변되고 있었고,

그 마지막 처절한 현장은 예의 그 "전몰자의 계곡"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전쟁에 의해 가장 피해를 입게 된 주민들, 포로들이 이 계곡에서 죽어 묻히게 된 비극을 

영화 속 갈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다뤘는데,

서두에 밝혔다시피, 이 영화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무엇보다 주인공 하비에 역의 카를로스 아레세스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초반의 다소 어눌하지만 사랑에 빠진 인물에서 중반의 분노, 그리고 알몸의 야생의 모습을 겪으며 점점 미쳐가는 주인공, 그리고 후반의 싸이코로 변모하는 모습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세르지오 역의 안토니오 드 라 토레의 연기 역시 감탄을 자아낼 정도이다.

이에 비해 나탈리아 역의 캐롤리나 방은 약간 백치미의 캐릭터인데, 표정 연기가 조금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 상영 내내 관통하고 있는 음악들은 영화의 비극과 슬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였는데,

자막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을 스코어들이 이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이끌어 낸 것 같다.





올 해에 본 영화 중에서 만족스럽게 본 영화가 많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내가 전율과 충격을 가져다 준 영화로, 당분간 이 영화의 인상이 쉽게 지워질 것 같지 않다.




* 이 글에 수록된 영화의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Tornasol Films가 가지고 있음. 

The copyright of all images from the motion picture used in this post is reserved by Tornasol Films.




블로그 글이 맘에 드시면 추천이나 댓글 부탁드려요!
Trackback 0 Comment 2
  1. oqc1 2012.08.15 07:41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고 가오. 판의 미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심호흡 한 번 하고 봐야겠네.

    • Favicon of https://gp.pe.kr BlogIcon 지피군 2012.08.16 10:50 신고 address edit & del

      판의 미로가 어린이의 눈에서 보는 다소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주제를 던지고 있죠. 판의 미로를 흥미있게 보셨다면, 이 작품도 상당하게 다가오실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