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Marvel Cinematic Universe) 페이즈 4에서부터 멀티버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후, 헐리우드 영화에서 멀티버스를 다루는 사례가 제법 많아졌다.
몇년 전까지만해도 '멀티버스? 그게 뭐야? 아 정신없어' 이런 낯섦을 호소하는 반응이 많았는데, 요새는 '멀티버스 피로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깐..
헐리우드에서 멀티버스의 화두를 직접적으로 던진 게 MCU라지만, 현재 MCU의 멀티버스는 플롯만 복잡하게 할 뿐 전체 틀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반면, 오히려 다른 작품들에서 멀티버스를 극의 장치로서 잘 활용했다는 호평들이 나오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올 해 2023년 오스카를 휩쓸었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또 다른 하나는 2019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 이하 뉴 유니버스).
이번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는 뉴 유니버스의 속편으로, 전편에서는 멀티버스의 붕괴를 하나의 세계에서만 다뤘다면, 이 작품에서는 이 사건을 스케일업하여 멀티버스 전체로 확장하였다.
#1. Spider(wo)mans
![]()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 |
![]() 스파이더우먼(스파이더 그웬) 그웬 스테이시 |
![]() 스파이더맨 2099 미겔 오하라 |
![]() 스파이더우먼 제시 드류 |
![]() 스파이더맨 인디아 파비르트 프라바카르 |
![]() 스파이더 펑크 호비 브라운 |
![]() 스파이더맨 피터 B. 파커(와 메이데이) |
![]() 스파이더 캣 |
#2. Canon Events
뉴 유니버스는 마일즈 모랄레스라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과 성장을 다루며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어'를 주장했다.
이번 작품에서 마일즈 모랄레스 개인사보다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본질적인 사건, 즉 '공식 설정 사건(Canon Event)'이라는 결정론과, 이 결정론을 파괴하려는 자유의지 간의 갈등을 핵심 주제로 두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멀티버스의 다양한 스파이더맨을 활용하게 되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일종의 밈(meme) 중 하나였던, "영원히 고통받는 벤 삼촌".
그는 여러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피터 파커의 잘못된 판단, 혹은 실수로 인해 조카가 지켜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스파이더맨은 10대의 나이에 벤 삼촌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캐릭터로 그려졌고, 이 사건과 함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공통의 명제를 남겼다.
MCU와 뉴 유니버스에서는 벤 삼촌 대신 메이 숙모 또는 애런 삼촌이 주인공의 눈 앞에서 죽임을 당했고, 뉴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다른 스파이더맨 모두 가장 대상만 달라졌을 뿐 동일한 경험을 겪는다.
(본작에서는 트라우마 치료를 받는 스파이더맨도 등장한다...)
본작에서 또 다른 주인공인 스테이시 그웬, (본편의 오프닝과 엔딩은 모두 그녀가 담당하고 있고, 테마곡도 연결된다.)
지구-65에서의 스파이더우먼인 그녀는 리자드의 죽음을 맞는 순간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인 경찰 스테이시 경감으로부터 살인자라는 누명이 씌여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이들 스파이더맨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게 되는 사건을 '공식 설정 사건'으로 통칭하며, 모든 스파이더맨의 탄생과정에서 겪어야 될 (결정론적) 비극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스파이더맨들에게 부여되는 '공식 설정 사건'은 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공식 설정 사건'은 주인공이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경찰이 불의의 사고로, 그것도 또 주인공 눈앞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는 스테이시 경감이 피터 파커 눈 앞에서 죽게 되었고,
본편에 등장하는 또 다른 세계(뭄바탄)의 스파이더맨(파비트르 프라바카르)도 같은 사건을 겪을 지경에 이른다.
그가 사랑하는 가야트리는 가까스로 구해내나, 가야트리의 아버지인 싱 경감을 잃게 될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깬 장본인이 바로 마일즈 모랄레즈.
그는 스파이더맨에게 공통적으로 결정론적 정체성을 부인하고, 이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번째 '공식 설정 사건'의 대상은 마일즈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2099년의 스파이더맨이자, 여러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의 집합체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수장인 미겔 오하라는 마일즈를 정통(canon)이 아닌 이단(heresy)으로 규정하고, 그를 소사이어티로부터 추방하고자 한다.
(사실, 미겔은 마일즈는 애당초 탄생해서는 안 되었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이며, 소사이어티에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웬은 세상(band)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일즈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소사이어티에서 그 탈출구를 찾았고 소사이어티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다. 마일즈에 대한 연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겔의 운명론에 더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에, 마일즈에게 더 이상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로 한 마일즈의 편이 되기로 선택하며, 자신의 세상(band)를 다시 만들어 가는 적극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투 비 컨티뉴드...
이렇게 이 작품은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로 대변되는 '운명론'에 저항하는 주인공 마일즈와 그웬을 두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 변종들과 각 세계를 다이나믹하게 표현하였다.
#3. Two Loves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는 사랑이다.
먼저는 가족애. 10대 청소년과 부모 간의 갈등과 해소의 과정을 통해 가족애를 그리고 있다.
두 주인공 마일즈와 그웬은 모두 가족과의 동일한 갈등을 가지고 있다.
마일즈와 그웬은 10대의 상징으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가지고 싶어하고, 부모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청소년이다. 두 사람의 부모는 심리적 감정적으로 멀어지려하는 10대 자녀를 둔 부모의 전형적인 괴로움을 보인다.
특히, 그웬은 스파이더우먼을 체포하려는 아빠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채 외로움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반면, 아빠와 화해하고 다가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빠인 스테이시 경감은 자기에게서 멀어져가는 딸에 대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 부녀의 갈등은 마일즈 가족에 비해서 더욱 골이 깊은 상황이다.
자신의 딸을 직접 체포하려 했을 정도로 직업 윤리에 충실한 스페이시 경감은 그웬이 떠난 뒤, 극심한 혼란 속에서 경찰의 신분마저 그만두고 딸과의 화해만을 기다리게 된다.
마일즈는 마일즈로서의 성장과정에서, 그리고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성장과정에서 가족과의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그의 부모 역시 혼란에 빠져 있으나, 무조건적으로 자녀를 다그치는 게 아니라 대화와 충고를 통해 자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볼 수 있었고, 그 대화에서 느껴지는 부모의 사랑에서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특히 엄마와의 대화에서의 감정선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마일즈는 부모의 걱정은 알고 있으나, 자신의 모습을 떳떳히 부모에게 밝히기에는 용기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배경에는 엄마의 격려와 조언이 있었고, 이렇게 일어서게 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고자 맘을 먹고 엄마에게 당당히 자신을 밝히게 된다. (결과는 의도한 바대로 되지 않았으나..)
그웬 역시, 결국 아빠와의 오해 상황에서도 아빠의 마음을 알고 얼른 그에게 달려가 안기게 된다.
또 다른 사랑은 두 주인공 남녀 간의 사랑.
마일즈와 그웬은 이미 전작에서 심리적 교감을 한 상황이다.
마일즈는 그웬의 스케치를 그리며, 그웬 역시 그녀의 세계에서 마일즈와의 사진을 보며 서로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그웬의 지구-1610B 방문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썸 타러..
스팟을 감시하는 임무가 있었지만 (온 김에?) 마일즈를 만나러 왔다가 그웬은 '모든 우주에서 그웬은 스파이더맨을 사랑하게 돼'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만, 그 뒤에는 '그런데 모든 우주에서 항상 끝이 좋지 않더라'라는 말이 따라 붙고 있는 게 복선으로 작용하게 될 지 좀 찝찝하다.
다만 저 대사가 아직은 불확실한 게,
지금 그웬은 지구-1610B의 그웬이 아니라 지구-65의 그웬인데, 모랄레스는 지구-1610B의 그웬과 이어진다는 말이 아닌지.. 그리고 아직 지구-1610B에서는 그웬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안 된다는 점.. (너무 많이 나갔나..)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의 사랑은 본작에서는 아직 발전하고 있는 단계로,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로 인해 그웬이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최종에는 마일즈를 선택하고 그를 돕기로 결정한다.
#4. Two Villans
주인공이 두 명이면 빌런도 두 명!!?
본 작품의 빌런은 조금 특이하다.
모랄레스의 숙적(?)인 스팟의 첫 등장은 개그 캐릭터. 등장만으로도 웃기고, 싸우는 것도 이게 싸우는 건지 개싸움인지 알 수가 없다.
특징적인 점은 성장형 빌런이랄까. 본디 똑똑한 캐릭터라 그런지, 본인에게서 비롯된 구멍들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최종적으로는 가공할만한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또 다른 빌런은 벌처 아니고, (스포일러)
미겔 오하라, 스파이더 2099
그를 두고 빌런이라고 해야되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빌런으로 보고 싶다.
주인공(모랄레스)를 적대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실력으로 해결하려는 점,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성격은 가히 여느 빌런에 못지 않은 악랄함을 보여주고 있다.
#5. A/V
뉴 유니버스와 마찬가지로 본작은 엄청난 시청각 정보를 관객들에게 꽉꽉 눌러 전달하고 있다.
각기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온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세계관의 특징(?)을 살리며 각각 고유의 화풍과 기법으로 등장한다.
전편에서 스파이더맨 느와르, 피터 포커, 페니 파커가 각기의 화풍을 가졌던 것처럼,
그웬의 캐릭터와 그의 세계에서는 파스텔톤의 수채화 느낌을, 스파이더 펑크는 모자이크 느낌,
무엇보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등장한 벌처는 무려 무채색 연필 스케치!!
이러한 캐릭터별 변화는 멀티버스의 특성을 직관적인 시각 정보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플롯 상 조금 지루해 질 수 있는 부분도 시각적으로 채워주고,
액션씬에서는 다소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시각적 정보들이 공급된다.
(때로는 이런 점 때문에 시각적 피로감을 호소할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오히려 플러스 요소였다.)
제작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를 착취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연출은 일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잘 했는데, 이렇게 뽑아내려고 쥐어짰나 싶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간 후덜덜한 결과물을 냈다는 점은 인정.
사운드트랙 역시 이러한 성격을 띄고 있다.
스파이더맨의 고유 특성을 살리면서 각 캐릭터마다의 테마를 입혀 각각의 색깔을 입혔는데,
마일즈에는 디제잉 스크래치, 봉고류의 타악기 음색을 주어 흑인 음악의 특성을 주었고, 그웬에는 수채화 화풍에 어울리는 몽환적인 음향(다만, 전투씬에서는 분위기가 확 바뀐다), 미겔에는 테크노 사운드의 미래 이미지를 덧입히는 식이다.
오프닝의 테마는 엔딩 씬과 연결되면서, 그웬이라는 주인공의 면모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수미쌍관법을 쓰고 있다.
(다만, 오프닝의 드럼 사운드가 강조되는 메인 테마에서는 상영관 내 사운드가 밋밋하게 출력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6. Trivia
- 이전 편부터 마일즈를 물었던 거미의 '42'가 눈에 거슬렸는데, 이게 멀티버스에 따라 부여되는 숫자였음이 밝혀졌다. (일찍이 이 숫자를 눈여겨 보고 있었기 때문에 후반부에서 마일즈의 잘못된 이정표는 충분히 예상했다. 그래도 실상이 밝혀지니 소오름..)
- 레고 세계관에서 등장한 데일리 뷰글, 그리고 조나 제임슨, 또한 심지어 JK 시몬스의 목소리!!!
- 세계관별로 뉴욕의 변주가 인상적. 인도의 뭄바탄(뭄바이 + 맨하탄의 합성어인 듯)에서 보이는 브루클린 브릿지(?), 2099년의 누에바욕(Nueva York: nueva는 new의 스페인어식 표기).
- 뉴저지가 멀어서 마일즈를 프린스턴에 못 보내겠다는 대사에서 빵 터진 것 나뿐이었음....
- 가장 명불허전의 장면은 삿대질 씬. 전편의 쿠키에서도 등장했고 여러 meme이 많은데, 본편에서 직접 등장하다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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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에 버금가는 정도로 좋은 평을 주고 싶은데,
다음 편을 어떻게 기다리나..
(1, 2부로 나눠져 있는 줄 모르고 본 1인...)
부록. Bing이 그려준 화풍별 스파이더맨 변종들
(나름 화가별 화풍을 표현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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